9월의 시 모음
9월
뜰이 슬퍼합니다.
차디찬 빗방울이 꽃 속에 떨어집니다.
여름이 그의 마지막을 향해서
조용히 몸서리칩니다.
단풍진 나뭇잎이 뚝뚝 떨어집니다.
높은 아카시아나무에서 떨어집니다.
여름은 놀라, 피곤하게
죽어가는 뜰에 꿈속에서 미소를 띱니다.
오랫동안 장미 곁에서 발을 멈추고
아직 여름은 휴식을 그리워 할 것입니다.
천천히 큼직한
피로의 눈을 감습니다.
헤르만 헤세
9월이 오면
그대
9월이 오면
9월의 강가에 나가
강물이 여물어 가는 소리를 듣는지요
뒤따르는 강물이
앞서가는 강물에게
가만히 등을 토닥이며 밀어주면
앞서가는 강물이 알았다는 듯
한번 더 몸을 뒤척이며
물결로 출렁 걸음을 옮기는 것을
그때 강둑 위로
지아비가 끌고 지어미가 미는 손수레가
저무는 인간의 마을을 향해 가는 것을
그대
9월의 강가에서 생각하는지요
강물이 저희끼리 속삭이며
바다로 가는 것이 아니라
젖은 손이 닿는 곳마다
골고루 숨결을 나누어 주는 것을
그리하여 들꽃들이 피어나
가을이 아름다워지고
우리 사랑도 강물처럼 익어가는 것을
그대
사랑이란 어찌 둘만의 사랑이겠지요
그대가 바라보는 강물이
9월 들판을 금빛으로 만들고 가듯이
사람이 사는 마을에서
사람과 더불어 몸을 부비며
우리도 모르는 남에게 남겨줄
그 무엇이 되어야 하는 것을
9월이 오면
9월의 강가에 나가
우리가 따뜻한 피로 흔드는 강물이 되어
세상을 적셔야 하는 것을
안도현
9월이 오면
이름 모를 들꽃으로 피겠네
보일 듯 말 듯 피었다가
보여도 그만
혼자만의 몸짓이고 싶네
그리운 것들은 언제나
산너머 구름으로 살다가
들꽃향기에 실려오는 바람의 숨결
끝내 내 이름은 몰라도 좋겠네
꽃잎마다 별을 안고 피었다가
어느 산 어느 강을 건너왔는지
물어보는 사람 하나 없는 것이
서글프지만은 않네
9월이 오면
이름 모를 들꽃으로 피겠네
알듯 모를 듯 피었다가
알아도 그만
몰라도 그만인
혼자만의 눈물이고 싶네
이채
9월에 꿈꾸는 사랑
날개는 지쳐도
하늘을 보면 다시 날고 싶습니다
생각을 품으면 깨달음을 얻고
마음을 다지면 용기가 생기지요
단 한 번 주어지는 인생이라는 길
시작이 반이라고 하지만
끝까지 걷지 않으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세상에 심어놓은
한 송이, 한 송이의 꿈
어느 들녘에서, 지금쯤
어떤 빛깔로 익어가고 있을까요
가슴은 온통 하늘빛으로 고운데
낮아지는 만큼 깊어지는 9월
한층 겸허한 모습으로
내 아름다운 삶이여!
훗날
알알이 탐스런 기쁨의 열매로 오십시오
이채
9월의 시
9월이 오면
해변에선 벌써
이별이 시작된다
나무들은 모두
무성한 여름을 벗고
제자리에 돌아와
호올로 선다
누군가 먼길 떠나는 준비를 하는
저녁, 가로수들은 일렬로 서서
기도를 마친 여인처럼
고개를 떨군다.
울타리에 매달려
전별을 고하던 나팔꽃도
때묻은 손수건을 흔들고
플라타너스 넓은 잎들은
무성했던 여름 허영의 옷을 벗는다
후회는 이미 늦어버린 시간
먼 항구에선
벌써 이별이 시작되고
준비되지 않은 마음
눈물에 젖는다
문병란
9월
가을이 오면
그대 기다리는 일상을 접어야겠네
가을역 투명한 햇살 속에서
잘디잔 이파리마다 황금빛 몸살을 앓는
탱자나무 울타리
기다림은 사랑보다 더 깊은 아픔으로 밀려드나니
그대 이름 지우고
종일토록 내 마음 눈시린 하늘 저 멀리
가벼운 새털 구름 한 자락으로나 걸어 두겠네
이외수
9월
태풍이 쓸고간 산야에
무너지게 신열이 오른다
모래알로 씹히는 바람을 맞으며
쓴 알약같은 햇살을 삼킨다
그래, 이래야 계절이 바뀌지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한 계절이 가는데
온몸 열꽃 피는 몸살기가 없을까
날마다
짧아지는 해따라
바삭 바삭 하루가 말라간다
목필균
가을노트
그대 떠나간 후
나의 가을을
조금만 거느려도
우수수 몸을 떨었다
못다한 말
못다한 노래
까아만 씨앗으로 가슴에 담고
우리의 사랑이 지고 있었으므로
머잖아
한잎 두잎 아픔은 사라지고
기억만 남아
벼 베고난 빈 들녁
고즈넉한
볏단 처럼 놓이리라
사랑한다는 것은
조용히 물이 드는 것
아무에게도 말 못하고
홀로 찬바람에 흔들리는 것이지
그리고 이 세상 끝날때
가장 깊은 살 속에
담아 가는 것이지
그대 떠나간 후
나의 가을은
조금만 건드려도
우수수 옷을 벗었다
슬프고 앙상한 뼈만 남았다
문정희
작은노래
하나의 태양이
이 넓은 세상을
골고루 비추다는 사실을
처음인듯 발견한
어느 날 아침의 기쁨
꽃의 죽음으로 키워낸
한 알의 사과를
고마운 마음도 없이
무심히 먹어버린 조그만 슬픔
사랑하는 이가 앓고 있어도
그대신 아파 줄 수 없고
그저 눈물로 바라보기만 하는
막막함
이러한 것들을 통해서
우리는 매일 삶을 배웁니다
그리고 조금씩
기도하기 시작합니다
이해인
나의 9월은
나무들의 하늘이, 하늘로
하늘로만 뻗어가고
반백의 노을을 보며
나의 9월은
하늘 가슴 깊숙이
짙은 사랑을 갈무리한다
서두르지 않는 한결같은 걸음으로
아직 지쳐
쓰러지지 못하는 9월은
이제는
잊으며 살아야 할 때
자신의 뒷모습을 정리하며
오랜 바램
알알이 영글어
뒤돌아보아도, 보기 좋은 계절까지
내 영혼은 어떤 모습으로 영그나?
순간 변하는
조화롭지 못한 얼굴이지만
하늘 열매를 달고
보듬으며, 누군가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다
서정윤
9월
무슨 일인가, 대낮 한 차례
폭염의 잔류부대가 마당에 집결하고 있다
며칠째, 어디론가 계속 철수하고 있다
그것이 차츰 소규모다
버려진 군용 텐트나 여자들이
호박넝쿨의 저 찢어져 망한 이파리들
먼지 뒤집어쓴 채 너풀거리다
밤에 떠나는 기러기 소리를 들었다
그러나 몇몇 집들이 더 돌아와서
또, 한 세상 창문이 여닫힌다
문인수
9월
코스모스는
왜 들길에서만 피는 것일까
아스팔트가
인간으로 가는 길이라면
들길은 하늘로 가는 길,
코스모스 들길에서는 문득
죽은 누이를 만날 것만 같다
피는 꽃이 지는 꽃을 만나듯
9월은 그렇게
삶과 죽음이 지나치는 달
코스모스 꽃잎에서는 항상
하늘 냄새가 난다
문득 고개를 들면
벌써 엷어지기 시작하는 햇살
태양은 황도에서 이미 기울었는데
코스모스는 왜
꽃이 지는 계절에 피는 것일까
사랑이 기다림에 앞서듯
기다림은 성숙에 앞서는 것
코스모스 피어나듯 9월은
그렇게
하늘이 열리는 달이다
오세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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